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 포스 (문단 편집) == 해병 항공대로 == 조 포스는 대학을 졸업했으나 그 무렵의 미국은 [[대공황]]의 여파가 채 가시지 않아 마음에 드는 직장을 구하기가 어려웠고, 비행에 대한 열망은 여전했다. 이에 청년 조 포스는 해병대에 자원 입대하여 26살이 되어서야 [[펜사콜라]](Pensacola) 기지에서 비행사 뱃지를 가슴에 달게 되었지만, 전투기 대신 [[샌디에이고]] 기지에서 [[L-5|OY-1]] 관측기를 모는 해병 제1사진정찰 비행대(Marine Photographic Squadron 1 : VMO-1)에서 근무하게 되었다. 그는 자신의 처지에 만족하지 못하고 전투비행대로 옮겨달라고 상부에 청원을 넣었지만, 전투기를 몰기에는 너무 늙었다고 거절당했다. 상관들도 전투기 보다는 [[비행정]]이나 [[폭격기]]를 모는 편이 낫다고 했지만, 고집 센 포스는 꿈을 꺾지 않았다. 그러던 차에 마침 [[일본]]이 [[진주만]]에 기습을 걸어왔고, 상황은 순식간에 바뀌어 늙은 조종사 조 포스에게도 기회가 찾아왔다. 조 포스가 학교동창 준 샥스태드(June E. Shakstad)와 결혼식을 올리고, [[F4F]] 와일드캣 전투기로 기종전환 훈련을 모두 마친 다음 일선에 배치된 때는 해병대가 개구리 뜀뛰기 작전을 시작했을 무렵이었다. 그와 비행대원들이 [[보그급 호위항공모함]] USS Copahee에 실려 도착한 이름 모를 섬, [[과달카날]]은 놀랄 만큼 열악한 곳이었으나 조 포스는 자신의 가치를 멋지게 증명해냈다. [[캑터스 항공대]]에 배치된 조 포스 중위는 불과 6주만에 일본군 항공기 23대를 확인 격추한 것이다. 대위로 진급한 몇 달 후, 다시 전투에 뛰어든 그는 3대를 더 제물로 삼았다. 해병대 최고의 조종사가 탄생한 것이었고, 조 포스는 일약 엄청난 명성은 물론 1943년 5월 18일에는 [[백악관]]에 초청받아 [[루즈벨트]] 대통령이 직접 그의 목에 명예훈장을 걸어주었다. 1943년 6월 7일에 나온 [[라이프]]지의 표지에는 활짝 웃는 조 포스의 사진과 함께 ''넘버원 아메리칸 에이스(America's No. 1 Ace)''란 문구가 큼지막하게 박혀 있었다. 그의 기록은 나중에 [[그레고리 보잉턴]]이 28대를 격추시키면서 깨졌지만, 그렇다고 그의 무공이 퇴색하는 것은 아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